비운의 왕 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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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의문화재

사적 : 문화재 가운데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큰 유적지로 국가가 법적으로 특별히 지정한 것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0724a

국가등록문화재 : 문화재청장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이다.특히, 일제 강점기 이후 근대에 생성·건축된 유물 및 유적이 중점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A%B5%AD%EA%B0%80%EB%93%B1%EB%A1%9D%EB%AC%B8%ED%99%94%EC%9E%AC

천연기념물 : https://namu.wiki/w/%EC%B2%9C%EC%97%B0%EA%B8%B0%EB%85%90%EB%AC%BC

비운의 왕 경순왕

연천사랑 6 19143 0

이 글은 향토사학자 최병수 선생의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비운(悲運)의 왕 경순왕(敬順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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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敬順王)의 영정(影幀). 경주의 숭혜전(崇惠殿)에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敬順王)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순왕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강하다.

고려에 항복했다’, ‘나라를 팔아먹었다’ .... 등등

아울러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점차 희박해지는 요즘 일반인은 물론이려니와 젊은 사람들 대부분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옛 장단 땅, 지금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성거산(聖居山) 기슭에 외로이 잠들어 계시는 신라 제56대 왕 경순왕(敬順王).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최전방 휴전선 근처에 위치한 경순왕의 왕릉은 사람들의 뇌리에 사라지고 백성들을 위해 미련 없이 왕권을 포기하였던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한 슬기로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왕이라는 불명예만 덧 씌워졌다. 과연 경순왕은 자신의 일신의 편안함만을 위하여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친 것일까?

경순왕(敬順王)이 원치 않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때는 이미 신라(新羅)가 망국(亡國)의 길로 들어선지 오래였다.

신라는 780, 혜공왕(惠恭王)이 피살되면서 시작되었던 진골(眞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끊임없이 되풀이됨으로서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왕당 평균 재위 기간이 10년이 채 안 되는가 하면, 귀족들은 끝없는 탐욕에 눈이 멀어 넓은 토지를 차지하는 사이에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몰락하였다. 노비를 3천이나 거느린 귀족이 출현한 반면 남의 집 노비가 되고 심지어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농민이 생겨날 정도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이중삼중으로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산 속으로 숨었으며,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었다. 그리고 9세기말 제51대 진성(眞聖)여왕 때가 되자 공공연히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켜 신라 왕조를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왕실을 떠난 민심을 읽지 못하는 경문왕(景文王, 48)에게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이야기가 붙어 다녔으며, 진성(眞聖)여왕이 임금이 된지 몇 해만에 경주 거리에는 나무 망국 찰니나제라는 글귀가 뿌려졌다.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면서 외웠던 염불 나무아미타불을 빌어 사람들은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하기를이라고 빌고 있었다. 조정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하나 둘 관직을 버리고 조정을 떠났다. 정성껏 마련한 개혁안을 진성(眞聖)여왕에게 제시하고 개혁을 통한 나라의 재건을 주장하였던 최치원(崔致遠)은 해인사로 숨었고, 당으로 떠났던 유학생들은 경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선(道詵)과 같은 이는 아예 신라의 운수가 다하였으며 이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다녔는가 하면, 기이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남으로서 민심을 더욱 더 흉흉해졌다.

 

52대 효공왕(孝恭王) 시대인 임신년(912)에 봉성사(奉聖寺) 바깥문 동서 스물 한 칸에 까치가 집을 짓고 또 신덕왕 4년 을해년(915)에는 영묘사 안 행랑에 까치집이 서른네 군데나 되고 까마귀집이 마흔 군데나 되었다.

 

 

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918년에는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므로 사흘 동안 불경을 강설 풀이하여 이것을 물리쳤더니 한나절이 채 안되어 또 울었다.”

 

경진년(920) 2월에는 황룡사 탑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이나 거꾸로 서 있었다. 또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 나왔다가 다시 벽속으로 들어갔다.”

 

견훤(甄萱)의 침탈, 마지못한 왕위 계승

55대 경애왕(景哀王) 3, 즉 서기 9279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영천군)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청했다. 왕건은 부하장수에게 명령하여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고려의 군사가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甄萱)은 그해 겨울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경애왕(景哀王)은 비빈(妃嬪)종친외척들과 포석정에서 즐겁게 놀면서 견훤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가 급습을 당하여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빈은 달아나 후궁으로 도망가고 종친과 외척 그리고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혀 귀하고 천한 신분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기면서 노비가 되기를 애걸했다고 한다.

견훤(甄萱)은 군사를 풀어 공사(公私)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 이에 좌우의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더니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했다. 그리고 부하들은 왕의 후궁들을 욕보였다. 그리고 경애왕의 족제 부()를 세워 왕을 삼으니 경순왕(敬順王)은 견훤에 의해 즉위한 것이다.

경순왕(敬順王)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왕위에 올라 경애왕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왕건(王建)과 경순왕(敬順王)의 만남

이듬해 무자년(戊子年, 928) 3월에 고려태조 왕건이 50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서라벌에 당도했다. 경순왕(敬順王)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와서 서로에 대해서 정리(情理)와 예의(禮儀)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얼큰해지자 경순왕(敬順王)은 왕건(王建)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화란을 초래했고 견훤은 불의한 짓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나라를 망쳐놓았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니 좌우의 모든 사람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왕건 또한 함께 눈물을 흘렸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이때 경주 인근에서 체류하면서 수시로 신라 궁중에 들어가 경순왕(敬順王)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려 3개월 이상을 경주 인근에 체류하면서 왕건의 부하들은 도적들의 침입을 막고, 궁중에 들어갈 때에도 엄숙하고 조용했으며 어떠한 물건에도 손을 대지 않음으로서 신라 백성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지난번에 견훤이 왔을 때에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이제 왕공(왕건)을 만나니 마치 부모를 대한 것 같다.”

 

송악(개경)으로 돌아온 왕건은 그해 8월에 사자를 보내어 경순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얹은 말을 선사하였고, 신라의 여러 관료와 장수들에게도 선물을 차등으로 나누어 주면서 삼한을 통일하기 위한 포석을 하나하나 진행해나갔다.

경순왕(敬順王) 7년 을미년(835) 10월에 경순왕(敬順王)이 신라 사방의 땅이 모두 다른 나라의 소유가 되어 땅 덩어리는 손바닥 만 해지고 국력은 약해져 사방이 도적이 들끓으니 도저히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경순왕은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가지고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은 옳으니 그르니 하며 의논이 시끄럽고 끝나지 않았다.

태자 일()이 말했다.

나라가 보존되거나 멸망하는 데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들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해서 힘을 다해 본 후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이나 전승해온 나라를 남에게 쉽사리 내줄 수가 있겠습니까?”

경순왕(敬順王)은 말했다.

 

나라가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존될 수가 없다. 이왕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간뇌도지(肝腦塗地:간장과 뇌장이 땅위를 바른다는 말로 죽음의 참혹함을 이르는 말)함은 나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이때의 경순왕의 조치를 손국(遜國), 양국(讓國)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를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마의(麻衣) 태자라는 별호가 생겼다. 그리고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법수사와 해인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 중에서)

개경(開京)으로 간 경순왕

고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의 국서(國書)를 받자 대상(大相) 왕철(王鐵)을 보내어 영접하게 했다. 경순왕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향했는데, 이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30 여리나 길게 늘어섰고, 길은 경순왕을 따라 나선 신라의 유민들과 구경을 나온 고려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왕건(王建)은 교외로 나가서 경순왕(敬順王)을 영접해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와 혼인하게 하여 개경에서 살게 하였으며, 태자 보다 위인 정승공(政丞公)이라는 벼슬을 주어 봉록 1천석을 주고 경순왕을 시종한 관원과 장수들에게도 모두 적당한 벼슬을 내려 거두었다. 아울러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바쳐 왕건(王建)에게로 귀부(歸附)하니 왕건을 매우 기뻐하며 경순왕을 후한 예로써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알렸다.

지금 왕이 나라를 내게 주시니 그 은혜를 받음이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과 결혼해서 길이 장인과 사위의 의()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왕건(王建)은 이미 해서(海西)의 유력한 호족(豪族)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장인과 사위의 의를 맺는 혼인정책으로 많은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경순왕에게 자신의 딸을 주고, 또 자신이 경순왕 가문의 사위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것이었다.

경순왕은 대답했다.

 

내 백부 억렴(億廉)에게 딸이 있는데, 심덕과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내정(內政)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그녀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이다.

 

진정한 통합

고려 태조 왕건의 손자 경종(景宗)은 경순왕과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태조 왕건이 비()로 삼았던 신성왕후(神聖王后) 김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이가 안종(安宗) ()이다. 그 안종(安宗)이 낳은 아들이 나중에 고려를 중흥의 길로 들어서게 한 왕, 8대 현종(顯宗)이다.

고려 후기의 고승 일연대사가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2권 제2 기이편(紀異編)김부대왕편 마지막장은 사관의 사론(史論)을 인용하여 경순왕을 평가하고 있다.

 

....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함은 비록 마지못해서 한 일이지만 또한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그때 만약 힘껏 사수하여 고려 군사에 항거했다가 힘이 꺾이고 기세가 다 되었더라면 반드시 그 종족을 멸망시키게 되고 무죄한 백성들에게 까지 화가 미쳤을 것인데, 이에 告命(고명)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순하였으니 그가 조정에 대하여 공로가 있고 백성에게 덕이 있음이 매우 컸던 것이다. -(중략)-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들도 번성했으므로,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계승하는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이 아니리요. (하략)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한 일은 명분을 중요시하는 이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불명확한 명분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과 고통을 당하였는지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비록 고려의 사가(史家)들이 평가한 일이지만,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歸附)한 일은 이미 오래전에 백성을 위해서 잘한 일로 당대의 평가를 받았다.

당시 고려(高麗)라는 새 나라에 융화된 신라인들은 천년 동안 쌓인 노하우를 자랑하듯이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책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金富軾),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방책인 시무 28를 성종(成宗)에게 지어올린 최승로(崔承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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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은경순대왕릉지(敬順大王陵誌)에 의하면 경기도 장단군 남팔리 성거산(聖居山) 줄기의 화장산(花藏山)에 위치한다고 되어 있다.

고려 경종 3(서기 978) 음력 44일에 개경에서 승하하였으며, 이곳에 대왕례로서 인산(因山)하여 능()을 조성하였다고 하였다.

능지(陵誌)에는 경순왕릉을 이곳에 조성한 연유에 대하여는 적혀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을 왜 경순왕릉이 경주나 개경 인근에 있지 않고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지 못하여 궁금해 한다. 경주김씨 가문 가승(家乘)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경순왕께서 개경에서 승하하자 후손들과 신라의 유민들은 왕의 고향인 경주로 가서 예장(禮葬)하고자 장례 행렬을 꾸미어 경주를 향해 길을 떠났는데, 개경의 시내가 텅텅 빌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경순왕의 장례행렬을 따라 나섰다.

신라의 유민들, 백성을 사랑하고 후덕하였던 경순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수만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경주로 향하기 시작하였는데,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던 고려 조정에서는 긴급 군신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한 끝에 경순왕은 태조의 따님과 결혼하였으니 고려의 왕족이나 다름없다. 고려의 왕족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도성 밖 100리 이상을 나가서는 안 된다. 따라서 돌아가신 경순왕이 왕으로서의 예장(禮葬)을 받고자 하면 가던 곳에서 멈추어, 개경 도성 밖 100리 안쪽에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이다.경순왕의 장례행렬이 경주로 가지 못하도록 군신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통보함으로서 개경에서 80리 거리인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남팔리(南八里) 성거산(聖居山) 기슭에 모시게 되었다.

 

경순왕릉은 고려 경종 3(978) 음력 44일에 개경에서 승하하여 경기도 장단군 남팔리(현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성거산 줄기에 능을 조성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풍상(風霜)을 겪게 되는데, 먼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란(兩亂)을 겪는 동안 능이 실전(失傳)되었다.

조선조 영조 3(1727)에 후손 김 굉(金硡)경순대왕장지(敬順大王葬地라는 6자가 새겨진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영조 23(1747)에 영역(瑩域)을 찾아내어 영조 임금에게 능을 보수하겠다는 상소문(修治疎)을 올렸다. 영조 임금이 강원충청감사를 지낸 김성운(金聖運)과 첨정 벼슬의 김응호(金應豪) 등으로 하여금 능묘(陵墓)를 새로이 봉축(奉築)하게 하고 장단부사(長湍府使)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그로부터 장단부(長湍府)에서는 매년 31일과 101일을 기해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드리게 하고 관군(官軍)으로 하여금 능을 수호토록 하였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3년여의 한국전쟁은 일제강점기에도 잘 보존되었던 경순왕릉은 끝날 무렵 최전방에 위치하게 되어 전쟁기간동안은 물론이려니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수십 년간 돌보는 사람이 없게 됨으로서 또 실전의 위기를 맞게 된다.

전쟁이 끝난 지 20여년이 흐른 1975년 경 이곳에 주둔하던 군부대의 병사가 잡목 숲속에 쓰러져 있는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는 묘비를 발견하여 당시 중대장인 여길도(呂吉道)대위에게 보고를 하였고 여길도 중대장은 지방관서와 국가기관에게 신고를 함으로써 1975년 문화재 국가사적 24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 백학마을이야기2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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