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군 중면 삭녕리
본래 삭녕군 읍내면(邑內面)의 동변리와 서변리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읍내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북면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동변리와 서변리가 합쳐져서 삭녕리라 하여 연천군 북면에 편입되었으나,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동면이 북면과 병합하여 삭녕면으로 개칭되면서 삭녕리가 되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의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사분계선을 포함하고 있는 이북지역에 해당한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중면에 편입된 법정리였으나 현재는 지명만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노장골[魯張洞] : 갈미봉 북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봉화 금씨(奉化琴氏)가 5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동편말, 동켠말[東邊里] : 서편말 동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는 삭녕군의 관아가 있었고, 삭녕장이 열리는 5, 10일이 되면 황해도 토산, 강원도 철원*안협*연천*장단 지역에서 모여드는 많은 상인들로 인하여 경기 북부 지역의 큰 상권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면사무소*보통학교*우체국*주재소 등의 공공기관이 소재하고 있던 곳이다.
서편말*서켠말[西邊洞] : 삭녕시가지를 반으로 나누어 서쪽에 있는 마을. 옛 삭녕군 읍내면의 서변리 지역이다.
차도래기[白石洞] : 삭녕리 가장 북쪽, 고마리와 경계에 있던 마을. 흰 차돌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박씨들이 13가구 살았던 곳이다.
갈마다리 : 삭녕시가지 서쪽, 여척리로 가는 326번 지방도에 있는 콘크리트 다리.
갈미봉 : 매봉산 동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 수백 년 묵은 큰 참나무와 우물이 있고, 어떤 장사의 것이라는 큰 발자국이 정상에 있는 바위에 남아 있었다 한다.
굿당 : 물레방앗간 동쪽, 갈미봉에서 내려온 산등에 있던 산제당. 큰 반송 한 그루가 정상에 있었는데 동편말 주민들이 치성을 올리던 곳이다.
놋다리나루 : 삭녕시가지 남쪽, 왕징면 장학리로 건너다니던 임진강 나루.
도깨비연당 : 놋다리 나루 북쪽, 326번 지방도 아래에 있는 고목나무 군락. 참나무*오리나무*옻나무로 우거진 이곳에서 밤이면 자주 도깨비가 나타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말미개울 : 고마리에서 발원하여 삭녕리를 경유하여 임진강에 합류하는 개울.
매봉산 : 삭녕시가지 북쪽에 있는 산. 높이 191m. 매봉재로도 불리워졌으며, 매년 10월이 되면 정상에 있는 산제당에서 동편말 주민들에 의해 산제가 올려지던 곳이다.
무당소 : 차도래기 아래 말미개울에 있는 소.
물레방앗간 : 동편말 동쪽에 있던 큰 물레방앗간. 아래위로 두 곳이 있었다.
삭녕관아터[朔寧官衙址] : 삭녕시가지 북쪽에 있던 조선시대 삭녕군의 관아. 옛 지리지에는 1441년(세종 23) 대사리에서 이곳으로 이건(移建)된 뒤에 530여년 동안 삭령군 7개 면을 관할했던 관청으로 객사*동헌(詠恩堂)*아사(衙舍), 향사당(鄕射堂)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 직후에 삭녕군이 연천군과 철원군에 분리*편입되면서 관아 건물은 강제 철거되었는데, 특히 포도청 건물은 일제의 삭녕신사 건립에 이용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면사무소가 세워지게 되었고 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공공건물과 민가가 들어서면서 자취도 없이 묻혀버렸다.
천나다리 : 매봉산 동북쪽, 말미개울에 있는 다리. 다리 아래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있었다 한다